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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중음악

잊혀진 발라드의 정석 '변진섭' (6집 IMAGE'94)

introduce

 변진섭은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한국 최고의 발라드 싱어로서 이름을 날렸던 초 대형 가수이다. 1987년 MBC 신인가요제에서 '우리의 사랑 이야기'로 데뷔해서, 1988년에 1집 '홀로된다는 것'을 발매하고, '홀로 된다는 것', '내게 줄 수 있는 건 오직 사랑 뿐', '새들처럼', '너무 늦었잖아요' 등 앨범 단 한 장만으로 수 많은 명곡들을 가요계에 흩뿌리며 1집을 180만장 이상 팔아치웠다. 그리고 그 열기가 식기도 전에 1989년에 2집 '희망사항'을 발표해 무려 250만장을 팔아 기록을 갈아치우며, 경이적인 가요 톱10 16주연속 1위라는 기록을 세웠다. 3집은 120만장 정도를 팔았다. 주간차트 1위를 뽑는 마당에 김빠지게 자신의 곡과 경쟁을 하는 등 초 대형스타 답게 여러가지 말도 안 되는 일화 등을 뿌리며 다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 순간부터인가 변진섭이 보이지 않게 되더니, 점점 인기가 사그라들면서, 현재는 발라드의 '반짝스타' 정도로 언급되면서, 한국 남성 발라드의 1세대 가수로서 한국 발라드의 역사를 언급 할 때만 '이러이러한 대단한 가수가 있었다.' 정도로 언급되는 역사속의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몇 달 전부터 본인의 11집을 내면서 방송활동을 하기 시작해, 조금씩 대중들에게 다시 다가서려고 노력하고 있는 가수이다.

 6집 이야기 하기 전에 왜 변진섭이 이렇게 되었는지부터 살펴봐야겠다. 

 변진섭은 당시에 최고의 인기를 누린 발라드 가수였으나, 남들에 비해서 너무 쉽게얻은 인기와, 눈코뜰 세 없이 바쁜 스케쥴 때문에 자신이 받은 것에 대해 별로 감사할 줄을 몰랐다. 음악프로그램에 출연을 해야하는데도, 어차피 당연히 자신이 1위 할 건데 별로 기쁘지도 않고, 귀찮다는 이유로, 방송을 펑크내고 그까짓거 대충 저번주에 1위했던걸 편집해서 방송하라고 했던 가수였다. 좀 너무 거만하다 싶을 정도로 방송활동도 하지 않았는데, 1시간 전체를 변진섭 특집으로 꾸며주겠다고 겨우겨우 애걸복걸해야 섭외 할 수 있었는데 그 사실이 신문 1면에 실리기도 했다.

 익은 벼는 고개를 숙여야 하는데, 상당히 거만했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 따끔하게 충고를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은 없었다. 누가 뭐래도 당시 한국 최고의 인기가수였으니까. 또 그것은 환경적인 영향이 컸다. 그가 뭘 해도 사람들은 무작정 박수갈채를 보내서 그에게 성찰할 기회를 주지 않았고, 또 무작정 달려오다 보니, 자신이 어디로 가고있는지도 알 수 없게 되었다. 당시 20대 초반의 어린나이였던 변진섭은 나이를 조금씩 먹어가고, 인기가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고, 변화하기 시작했다.

 변진섭 6집 소개를 해야 하는데, 변진섭의 역사를 읊고 있는 이유는, 이번 6집 앨범의 타이틀 'IMAGE'94' 때문이다. IMAGE'94는 변진섭 6집의 3번트랙 수록곡의 제목이기도 한데, 자기자신의 이미지, 예전의 인기에 집착하던 자신, 자신이 예전에 했던 노래들과, 그것을 좋아하는 팬들을 뒤로하고, 자신의 음악을 찾으러 가겠다는 의지를 그대로 담은 곡이다.
 
 3집,4집부터는 인기가 많이 떨어지긴 했지만 나름대로의 인기를 끌어오다가 점차 가요계에서 사라지게 된 이유가 담겨있다. 하지만 아무도 6집을 듣지 사지를 않아서,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이 많이 없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가 MBC '무릎팍 도사'에 출연해서 한 발언으로 그 이유를 처음 알게 됬을 것이다. 그가 가수활동을 접지 않고, 꾸준히 앨범을 내 왔었다는 사실 까지도.

 
album

6집의 사진은 찾을 수가 없다..-_-;; 이 사진은 5집의 사진이다.



 이상하게도 변진섭 본인이 직접 작사작곡한 노래가 하나도 없다. 분명히 본인 자신의 이야기를 주제로 한 앨범이고, 변진섭이라면 프로듀서에게 끌려다니면서 시키는 대로 할 만한 가수가 아닌데도, 앨범의 어디에도 그가 참여했다고 할 만한 증거를 찾을 수가 없다. 앨범에 참여한 아티스트의 수가 많지 않다는 점으로 추측해 보아, 변진섭은 자신과 마음이 잘 맞는 아티스트들과 함께 작업 하면서 의견교환이나 수정 등등을 하며 앨범에 참여해 왔을 것이다. 그러나 팬들을 뒤로하고 자신의 음악세계를 찾기 위해 떠나간 정도의 열정이라면, 못해도 2~3곡 정도는 직접 쓰는 게 보통인데 역시 좀 특이한 경우이긴 하다.

 앨범에 참여한 사람들을 보면, 거의 모든 곡을 유승범씨가 작곡했는데, 유승범이 작곡한 곡들은 마치 변진섭에게 마춤 양복처럼 잘 맞는 것 같다. 작곡을 거의 도맡아 할 만큼 마음이 잘 맞는 것 같다. 추측하건데, 둘은 아마 사랑하는 사이였을...  작사도 비슷비슷한 인물들 끼리 몇 곡씩 나눠가면서 했다. 

 
 1. 니가 오는 날     작사: 박주연, 작곡: 유승범
 비오는 소리와 고즈넉한 기타소리로 곡이 시작되어서 감상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단어 하나 하나에 감정을 불어넣는 것 처럼 단어에 힘을 줘서 부른다. 변진섭의 곱게 정제된 미성으로 천천히 노래하는데 왠지 녹음하면서 눈을 감고 있었을 것만 같은 분위기이다. 조금씩 들어가는 에코는 곡에 번진 듯 한 느낌을 줘서 플라토닉한 느낌을 강조한다.

 2. 처음보다 더 어제보다 더     작사: 함경운, 작곡: 유승문
 모든 연인들의 로망, 바닷소리가 조금씩 들리는 것 부터 곡이 시작된다. 밝은 노래에 살짝 빠른 템포의 곡이다. 경쾌하게 각 마디의 끝부분을 살짝 올리면서 툭툭 던지듯이 노래를 한다. 아주 느린템포의 이별이야기만 발라드가 아니고, 발라드의 감성을 지닌 발라더가 부른다면, 어떠한 곡도 발라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 같다. 밝고 희망찬 가사와 멜로디만으로 사람을 빠져들게 만든다. 나중에는 어떤 여성의 바닷가에서 '나 잡아 봐라~'를 하는 듯 한 웃음소리와 함께 낯간지러운 사랑이 듬뿍 담긴 나레이션이 등장하기도 한다. 촌스럽긴 하지만, 저절로 입가에 미소를 짓게 한다.

 3. IMAGE'94     작사 작곡: 윤일상
 좀 전에 소개했던 곡이다. 자기자신, 그리고 팬들에게 바치는 일종의 편지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노래는 밝고 경쾌하게 부른다. 예전의 인기와, 명성을 버리면서도 안타까워하지 않고, 희망차게 한 발 더 내딪겠다는 의지로 보이다.

 4. 이기심+사랑     작사 작곡: 윤일상
효과음으로 시작하는 곡들이 참 많다. 효과음에서 나타나는 이미지를 그대로 따라간다면 곡의 구체적인 상황이해라든가, 감정 몰입하기가 훨씬 쉽다. 요즘은 발라드에서 어떠한 형식을 강조하면서 이런 괜찮은 기법들이 많이 사라진 것 같아서 아쉽다. 뭔가 부시럭거리면서 담배에 불을 붙이고, 맥주캔을 따서 한 모금 마신다. 꿈결처럼 들려오는 기타소리들로 반주가 시작되고, 애절하게 노래를 한다. 마지막에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미안해'라고 한마디 하면서 곡이 끝나는데, 노래 중에 쌓여온 모든 감정들이 이곳에 집중되면서 많은 여운을 남긴다.

 5. 피아노     작사: 이재형, 작곡: 유승범
 살짝 빠른 템포에 가볍고 경쾌하게 부른다. 제목이 피아노 인 것 만큼, 피아노 반주가 많이 나온다. 피아노를 듣고 싶어하던 그녀였는데, 이젠 그녀가 없다며 슬퍼한다.

 6. 이름없는 거리     작사: 지예, 작곡: 유승범
 대중적인 멜로디의 노래이다. 필자의 짧은 소견으로는, 이 곡이 이번 앨범에서 가장 대중적인 멜로디의 곡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맨 처음 들었을 때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곡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착각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지만, 어쨋든 노래는 상당히 괜찮았다.

 7. 삼각관계     작사: 이재경, 작곡: 유승범
 또 미디엄템포의 켱쾌한 곡이다. 익숙한 멜로디인 '스팅'을 샘플링했다. 자신은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자기를 좋아하는 누군가가 귀찮게 달라붙고, 이상한 소문을 자꾸 내곤 해서, 냉정하게 거절하는 곡이다. 이렇게 경쾌한 기분으로 누군가를 거절할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_-;;)

 8. 너 뿐인걸     작사: 함경문, 작곡: 유승범
 변진섭의 목소리로도 저렇게 애절하게 부를 수도 있구나 하고 생각한 곡이다. 다른 곡들보다 절정부가 길고, 소리를 많이 지른다. 제목에 적힌 것 처럼 '너 뿐인 걸'하며 이별해야 하는 상대에게 호소하고 있다. 대중적인 멜로디와, 피아노 반주가 중심이 된 곡이다.피아노 반주는 다른곡에도 많지만, 기타의 비중이 작고, 조용한 상황에서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라서 더 잘 들린다.

 9. 언덕위의 나무 (환경을 위한 노래)     작사: 이재경, 작곡: 유승범
 부제가 '환경을 위한 노래'이다. 가사도 대 놓고 환경을 위한 가사이다. 쉼터가 되어준 언덕 위의 나무가 베어지고, 집이 들어서고, 낮에도 어두운 그늘이 되어버렸다는 가사이다. 리듬감이 있고, 템포도 빨라서 슬프다거나 무겁다거나 하지 않고 그저 가벼운 느낌이다. 무거운 가사에 가벼운 노래라 부조화스러운 느낌이 있기도 하다.

 10. 작은 새     작사: 지예, 작곡: 유승범
 '이제는 나에게서 날아가려는 작은 새 한마리 놓아 주리라' 어쩌면 작은 새가 변진섭 자기 자신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의 음악을 위해 예전의 모습들로 스스로를 얽매지 않고, 놓아주겠다고 해석해도 괜찮을 지는 모르겠다. 그 새가 언젠가 돌아온다면 기쁘게 맞아들이겠다고 한다. 약간 짜 내는 듯하게 애절한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며 의지적인 자세를 보이며 노래한다. 세션이 다른 곡들에 비해서 조금 많이들어간 것 같아서, 비록 조용조용히 연주하기는 하지만 웅장하고 강렬한 느낌을 준다. 절정부에서 다른 곡들에서는 '메트로놈'이상의 의미를 갖지 않았었던 드럼의 비중이 높아진다. 새소리로 추측되는 목관악기의 소리도 들리고, 높은 곳에서 울려퍼지는 듯한 종소리가 끓어 오르는 감성에 마침표를 찍는다.(종 소리가 자유로운 새의 이미지와 잘 어울린다.) 


and

 이번 앨범에서의 약간 아쉬운 점은 밝은 곡과 어두운 곡이 거의 번갈아가면서 나와서 몰입하기가 힘들다는 점이다. 이전 트랙에서의 여운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는데, 다음 곡으로 밝은 노래가 나와서 살짝 방해받는 듯 한 감정을 느꼈다만, 전체적으로 그렇게 기분나쁘거나 거슬리지는 않았고, 그렇게 쥐었다 놨다 하면서도 앨범이 끝날 때 쯤에는 자기도 모르게 깊게 몰입되어있는 것을 느낄 수 있어서, 크게 좋지 않다라고 표현할 만한 건 아니다.

 유명한 앨범은 아니지만, 명반인 건 인정해야 한다.
 옛날노래들이라 약간 촌티나는 작곡이나, 편곡이 아니라고 말 할 수는 없겠다. 하지만 그런 '촌스러움'들이 전혀 우습다거나, 이상하지 않았다. 오히려 앨범의 '촌스러움'은 그의 노래에 깊게 빠져들 수 있게 해 줬고, 도저히 헤어나올 수 없도록 내 감성을 잡아 이끄는 세상 최고의 반주처럼 들렸다. 그제서야 알 수 있었다. 발라드를 표현하기에 가장 좋은 수단은 결코 최첨단이나 디지털 따위가 아니다. 모든 발라드적인 감성의 기본은, 가장 정제되고 순수한, 90년대의 아날로그에서 나온다. 요즘의 발라드 가수들은 이런 점을 아주 잊고, 최첨단만을 추구한다. 최첨단 기계들을 동원한 녹음과 디지털사운드라도 이런 발라드의 로맨틱한 감성을 따라잡을 수는 없다. 수채화 물감처럼 흐릿하게 퍼지는 듯한 소리들. 처마 밑에 떨어지는 빗방울, 증기기관차의 기적, 새벽의 종소리.
 
 변진섭은 그런 부분을 최대한으로 끌어내고 다듬어낼 수 있는 가수이다. 비록 대중과는 멀어져버렸지만, 그의 발라드의 감성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다. 처음 살 때부터 변색되고 탈색된 듯한, 누군가가 오랫동안 소장했던 것 처럼 손때묻은 파스텔톤의 앨범을 처음 봤을 때부터 느낄 수 있었다. 꿈 꾸는 것 처럼 웅웅되는 메아리를 남기며 머릿속을 돌아다니는 그의 목소리는 현존하는 가장 순수한 형태의 발라드이다. 다른 훌륭한 발라드 가수들도 많지만, 변진섭은 그 중에서도 가장 기본에 충실한 '발라드의 정석'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다른 가수들을 비하하는 것은 아니다. 다들 나름의 특징이 있으니까)